
AI 시대의 기술 해자
목차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은 다릅니다
얼마 전 AI 컨퍼런스를 다녀왔습니다. 수많은 제품과 시연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제품들 중 얼마나 많은 제품을 바이브 코딩으로 비슷하게 구현할 수 있을까?”
전시와 시연만 보고 받은 주관적인 인상이지만, 80~90% 정도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핵심 기능을 상당 부분 구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비슷하게 작동하는 시제품을 만드는 것과, 실제 고객이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기능만으로 성능, 안정성, 보안, 운영의 완성도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누구나 꽤 그럴듯한 수준까지는 소프트웨어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있다는 것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 제품을 따라 만든 경우뿐 아니라, 전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만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객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돈을 낼 의향이 있는지, 그런 고객에게 어떻게 도달할지, 한 번 구매한 뒤에도 다시 구매하거나 계속 비용을 지불할 이유가 있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매출이 생긴다고 이익이 남는 것도 아닙니다. 제품을 제공하고 운영하는 비용을 감당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고객의 지불 의향을 확인했더라도 수익성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술은 이 과정에서 어떤 경쟁력을 만들 수 있을까요?
만드는 장벽과 분석하는 장벽이 함께 낮아집니다
개발 장벽이 낮아지는 변화를 구체적으로 체감하게 한 도구가 있습니다. 최근 등장한 REA(Reverse Engineer Anything)입니다. REA는 AI 에이전트를 리버스 엔지니어링 도구와 연결해, 소스 코드가 없는 프로그램의 구조와 동작을 분석하고 유사한 기능을 재구현하도록 돕습니다.
기존에는 이런 분석을 수행하려면 리버싱 전문가가 IDA Pro 같은 도구를 직접 다루며 프로그램의 구조를 추적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에이전트에게 “이 제품의 특정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하고, 제 프로젝트에 비슷한 기능을 구현해주세요”라고 요청하면 됩니다.
사용자가 분석 도구를 직접 조작하는 대신, 에이전트가 REA를 통해 연결된 IDA·Ghidra·Hopper 등을 활용하고, 결과를 해석하며 분석과 구현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분석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기존 소프트웨어를 이해하고 재구현하는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게임을 변형하거나 다른 환경으로 옮기려는 시도도 눈길을 끕니다. 엘든 링에 마인크래프트를 접목한 시연 영상이나, PS5 실행 파일을 Windows와 Linux 환경으로 이식하는 AnyPS5 프로젝트가 그 예입니다.
지난 1년 사이 제가 체감하는 제품의 출시와 개선 속도도 훨씬 빨라졌습니다. 앞으로는 이 속도가 더 빨라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가 이어진다면, 어렵게 구현한 기능이 경쟁사에도 오랫동안 구현하기 어려운 기능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소프트웨어로 지속적인 수입을 얻으려면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하면서 경쟁에도 대응해야 합니다. 이때 경쟁사가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기술의 해자는 어디에 남을까요?
코드를 만들 수 있어도,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살펴볼 사례는 네이버의 쇼핑 검색 API 종료입니다.
네이버는 개발자센터에서 제공하던 쇼핑 검색 API를 2026년 7월 31일자로 종료한다고 공지했습니다. 쇼핑 인사이트 등 일부 API는 NAVER API HUB로 이관하지만, 쇼핑 검색 API는 이관 대상에서 제외하며 별도의 대체 API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안내했습니다.
상품 검색 화면과 가격 비교 기능을 비슷하게 만들더라도, 그 안을 채울 상품 정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갱신하는 문제는 남습니다. AI가 코드를 작성해준다고 해서 다른 플랫폼의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까지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구현하기 어려울까요?”뿐 아니라, “구현하더라도 무엇을 확보하기 어려울까요?”를 함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 AI 시대의 데이터 폐쇄화(Data Enclosure)와 플랫폼 독점화 동향 네이버 쇼핑 검색 API 종료와 Reddit·X·Cloudflare 사례로 데이터 접근의 종료, 용도 제한, 계약과 과금이 플랫폼 경쟁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봅니다.
쉽게 재현하기 어려운 여섯 가지
1. 이미 사용자 네트워크와 고객 접점을 확보한 플랫폼
플랫폼의 화면과 기능을 만드는 것과,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용자와 거래 관계를 확보하는 것은 다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가입자 수보다 사용자 사이의 연결, 누적된 거래 이력과 평판, 다른 서비스로 옮기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비슷한 플랫폼을 만들 수 있어도 그 안의 사용자와 거래 생태계까지 함께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고객에게 도달하는 경로도 살펴봐야 합니다. 이미 고객이 사용하는 제품 안에 새로운 기능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과, 고객에게 별도의 제품을 찾아 설치하고 구매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기업은 출발 조건이 다릅니다. 같은 기능을 구현했다고 해서 같은 고객 접점을 확보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플랫폼을 평가할 때는 사용자 수와 함께 다음을 묻게 됩니다. 사용자는 왜 이곳에 남아 있을까요? 새로운 제품을 기존 고객에게 얼마나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경쟁사가 같은 조건으로 제품을 냈을 때 고객이 이동할 동기가 있을까?**입니다.
2. 대규모 인프라와 컴퓨팅 자원이 필요한 사업
서비스를 구동하는 코드를 작성하는 것과, 이를 원하는 규모와 비용으로 운영할 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 영역에서는 컴퓨팅 자원뿐 아니라 전력, 공간, 조달 능력, 운영 경험까지 살펴봐야 합니다. 비슷한 기능을 구현하더라도 같은 처리량과 안정성을 같은 비용으로 제공할 수 있는지는 별도로 평가해야 합니다.
다만 누구나 같은 조건으로 빌릴 수 있는 자원이라면, 단순히 많이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강한 해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투자 규모가 크다는 것과 경쟁사가 따라오기 어렵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같은 자원으로 더 높은 성능을 내는 기술, 남들이 확보하기 어려운 공급 조건, 규모가 커질수록 유리해지는 운영 구조가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장비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원을 확보하고 경쟁력 있게 운영하는 기반입니다.
3.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제품
컨퍼런스에서 제 눈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제품이 소프트웨어만 제공하는 제품보다 훨씬 따라 만들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비슷한 기능을 코드로 구현하는 것에 더해, 그 기능이 실제 장치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프트웨어를 재현하더라도 물리적 성능과 내구성, 부품 수급, 생산과 품질 관리, 유지보수의 문제까지 함께 해결해야 합니다.
로봇을 예로 들면, 상황을 판단하고 동작을 지시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과 실제 환경에서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로봇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코드상으로는 같은 명령이라도 장치의 구조와 성능, 사용 환경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함께 조정하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하드웨어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강한 해자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같은 부품을 조립해 비슷한 품질을 낼 수 있다면 그 장벽은 높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범용 부품을 사용하더라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완성된 제품으로 만들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에는 코드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남습니다. 제게는 이 차이만으로도 소프트웨어만 제공하는 제품보다 따라 만들기 어려운 이유가 충분해 보였습니다.
4. 경쟁사가 쉽게 확보할 수 없는 데이터와 학습 구조
기업의 거래 내역, 고객 상담 기록, 현장의 문제 해결 사례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분석 프로그램은 비슷하게 만들 수 있어도, 다른 회사가 수년간 쌓은 실제 업무 데이터까지 함께 얻을 수는 없습니다.
블록체인 자금세탁방지(AML)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개된 거래 기록을 읽는 것과, 어떤 주소가 거래소나 범죄 활동에 연결되는지 알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Chainalysis 같은 분석기업은 거래 기록에 별도로 조사하고 검증한 정보를 결합해 주소와 실제 주체를 연결합니다. Chainalysis
여기에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거래가 실제로 어떤 거래였는지 확인하고, 그 결과를 다음 분석에 반영할 수 있다면 경쟁력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경쟁사는 프로그램뿐 아니라 정보를 확보하고 검증하는 과정까지 따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해자는 데이터의 양만이 아니라, 남들이 얻기 어려운 정보가 계속 쌓이고 제품 개선으로 이어지는 구조에 있습니다.
5. 사업을 할 자격과 데이터를 활용할 권한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고 바로 그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인허가와 보안 요건, 계약상 권한을 갖추는 일은 별도로 남습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가상자산 거래소를 운영하려면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하고 수리받아야 하며, 자금세탁방지 업무를 수행할 인력과 관리체계도 갖춰야 합니다. 거래 화면이나 AML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만으로 거래소를 운영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금융위원회
이 기반은 앞서 설명한 데이터의 해자와 맞물릴 수 있습니다. 데이터와 기술로 앞선 기업은 필요한 보안·운영 요건을 갖춰 기관과의 협력을 넓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미 사업 자격과 고객을 확보한 기관은 적법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업무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데이터가 사업 기회를 만들고, 사업 기반이 다시 데이터를 쌓을 기회를 만드는 관계입니다. 두 가지가 결합되면 경쟁사는 같은 기능뿐 아니라, 데이터를 확보할 경로와 이를 활용해 사업할 수 있는 기반까지 재현해야 합니다.
6. 고객의 업무에 깊이 결합된 시스템과 전환 비용
회사가 쓰는 전자결재나 회계 시스템을 바꾼다고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새 제품이 더 저렴하고 화면도 편리하다고 해서 바로 교체하기는 어렵습니다.
출장비 하나를 정산하더라도 부서별 결재선, 회사의 지급 기준, 법인카드 내역, 회계 처리가 연결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스템을 바꾸려면 과거 자료를 옮기고, 이런 연결을 다시 맞추고, 직원들에게 사용법도 안내해야 합니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새 기능이 얼마나 좋은가?”뿐 아니라 “월말 정산이 밀리지는 않을까?”, “기존 결재 문서를 그대로 조회할 수 있을까?”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제품 가격에는 드러나지 않는 교체 비용과 업무상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쟁 제품은 기능이 조금 더 좋거나 가격이 조금 더 저렴한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바꾸는 데 드는 수고와 위험을 감수할 만큼 나아야 합니다.
이때 해자는 단순히 익숙한 화면이 아니라, 그 제품을 중심으로 이미 돌아가고 있는 회사의 업무 방식에 있습니다.
기술 재현 난이도와 사업 기반 확보 난이도
제품을 구현하는 어려움과, 그 제품으로 사업할 기반을 갖추는 어려움은 다릅니다. 앞서 살펴본 해자도 이 두 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X축은 ‘기술 재현 난이도’입니다. 같은 기능과 성능, 효율, 안정성을 구현하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뜻합니다.
Y축은 ‘사업 기반 확보 난이도’입니다. 필요한 데이터, 인프라, 공급망, 법적 권한, 고객 관계와 신뢰를 갖추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뜻합니다.
예시의 위치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배치이며, 업종별 점수나 객관적 순위가 아닙니다. 같은 분야에서도 기업과 제품에 따라 위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자결재 기능을 구현하는 것과, 고객사의 결재·회계 업무에 깊이 자리 잡은 상태를 재현하는 것은 다릅니다. 로봇처럼 설계·제어 기술과 생산·공급 기반이 함께 필요한 제품은 양쪽 모두에 장벽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구분은 업종별로 고정된 점수를 매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경쟁사가 따라오기 어려운 이유가 기술에 있는지, 사업 기반에 있는지, 양쪽 모두에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기준입니다. 두 축은 경쟁 우위가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것만으로 수익성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해자가 있어도 고객이 지불하는 금액으로 제품을 제공하고 운영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 이익을 내기 어렵습니다.
소프트웨어의 가치와 지속적으로 돈을 버는 조건
AI가 일부 기능을 쉽게 구현하도록 만든다고 해서 기술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낮은 비용으로 높은 성능과 안정성을 제공하거나, 아직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다만 ‘이 기능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독창적인 제품도 돈을 낼 고객에게 도달하고, 제공·운영 비용을 감당한 뒤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필요한 데이터와 권한을 확보하고, 고객의 업무에 자리 잡으며, 실제 운영을 통해 신뢰를 쌓는 일은 고객이 계속 선택할 이유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런 사업 기반도 영구적인 해자는 아닙니다. AI는 시스템을 바꾸는 비용을 낮출 수 있고, 신뢰는 운영과 대응이 기대에 못 미치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기존 제품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쟁자가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해자는 단순히 **‘남들이 만들지 못하는 기능’이 아니라, ‘남들이 같은 기능을 만들어도 쉽게 대체하지 못하는 이유’**에 있습니다.
제게는 “이것을 만들 수 있을까?”와 함께 **“고객이 계속 돈을 낼 이유가 있고, 그 돈으로 비용을 감당한 뒤에도 이익이 남을까?”**를 묻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